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초공작전 (문단 편집) === 포위된 장휘찬 === 장휘찬 부대는 원래도 늦게 출정했지만 12월 17일에 또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12월 21일 아침에야 동고에 이르렀다. 12월 21일 아침에는 안개가 많이 끼였던 탓에 공병번 부대와 장휘찬 부대가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여 4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장휘찬은 이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공병번은 장휘찬이 자신을 시기하여 그런 짓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인부로 떠나버렸다. 공병번이 이런 태도로 나오자 장휘찬도 공병번과 연락을 끊어버렸고 '''두 사단의 합동 공격 계획은 무산되었다.''' 12월 24~28일, 국민혁명군 5개 사단이 인부, 남농 지구로 진입했고 공병번과 장휘찬은 만안, 태화, 흥국으로 진군해왔다. 홍1방면군은 먼저 담도원의 50사단을 타격하여 큰 피해를 준 후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장휘찬의 부대를 포위하였다. 29일 오전 10시, 장휘찬의 부대가 용강에 진입하였지만 공산당의 소개 작전으로 인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국민당에 적대적인 <자림서보>의 보도에 따르면 이때 18사단은 홍군이 남긴 많은 금전을 노획하여 긴장이 풀어졌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은 보도이다. 장휘찬은 공산군 척후병을 사로잡아 공산군의 위치를 추궁하였는데 이에 포로는 동쪽 및 북쪽의 산에 공산군이 숨어 있다고 자백했다. 이에 장휘찬은 30일 새벽, 공산군의 위치를 어림잡아 동쪽의 우문령으로 공세를 개시했는데 이는 명백한 실수였다. 이미 공산군이 12월 21일부터 공세작전으로 전환하고 황피, 마전에 매복하여 장휘찬의 18사단을 멀리서 포위하고 그들의 상황을 살피며 반격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